주룩주룩, 선 굵은 장대비가 힘겨루기라도 하듯 퍼부어댄다. 한 50여일의 지루한 장마 끝에 지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심상치가 않다. 이쯤 되면 거의 물 폭탄 수준이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면서 안절부절못한다. 티브이를 켜니 화면에서도 빗줄기가 거침이 없다. 아예 우산을 접고 비옷으로 무장한 기자는 시간당 100㎜이상의 폭우라고 한다.여름은 장마의 계절이다. 장마가 오면 꿉꿉하고 누겁기는 해도 반갑고 든든한 마음이 앞선다. 자연의 순환 기능으로써,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며 타들어가는 자연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준다. 장마는 한마
[이모작뉴스 김경 기자] ‘에세이 21’에서 원고 청탁서가 왔다. ‘추억의 사진 한 장’ 난에 게재한다며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추억담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잠깐 시간을 되돌려보다가 일단 컴퓨터를 켜고 사진첩에 들어가 본다. 의외로 이런저런 사진들이 많이 내장되어 있다. 한동안 사진마다 깃든 추억을 복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한순간, 나는 별빛처럼 빛나는 섬광과 마주하며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을 붙박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
무대에는 현악 4중주단이 자리를 잡고, 객석에는 초록 식물들이 빼곡하다. 이 낯선 풍경은 무엇이지? 나는 신문에 실린 정체불명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사진 설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에서 열린 우세르 현악 4중주단의 리허설이다. 곡명은 푸치니의 현악 4중주 인데, 화분들이 관중으로 참석했다. 식물을 초대한 연주회라니, 기발한 착상이다. 초록식물의 대잔치다. 모처럼 식물들이 귀한 초대를 받았다. 코로나 시대의 진풍경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화음이 울려
이번에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꽈리고추 볶음이다.나는 오늘 반찬의 대미를 장식할 주재료에 슬쩍 윙크를 보낸다. 포도씨유와 게간장이 자글자글 한소끔 끓어오르는 프라이팬에 푸릇푸릇한 꽈리고추를 재빨리 넣어 볶으니 금세 윤기다 돈다. 마늘 슬라이스와 잔멸치를 곁들여 한 차례 더 볶는다. 상큼한 고추 향이 주방 한가득 떠돈다.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는 보일 듯 말 듯, 통깨는 듬뿍 흩뿌린다. 맛은 차치하고 비주얼만으로도 대만족이다.얼마 만인가. 작정하고 이것저것 넉넉하게 솜씨를 좀 부려보았다. 아들네가 오면 같이 식사하고 나서 싸 보낼 요량이다.
6월인데도 벌써부터 후텁지근하다. 엊그제만 해도 산책길의 흐드러진 장미꽃에서 슬쩍 여름을 예감했을 뿐인데, 어느새 한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사계절의 순환이 그 궤도를 이탈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봄이 오는가 하면 여름으로 넘어가고, 여름은 또 아열대를 방불케 한다.간단한 점심 설거지를 하는 데도 금세 목덜미가 끈적끈적하고, 등줄기가 스멀거린다. 나는 수건으로 땀을 훔치다가 문득 부채가 생각난다. 재바르게 책장 서랍을 여니, 이런저런 부채들이 얌전히 차곡차곡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색채가 아름다운 단선(團
몇 해 전, 우리는 용마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남편이 친구들과 산에 오르면서 인연을 맺고, 나는 또 그 인연에 푹 빠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 낯선 곳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은 친숙함에 사로잡혔다. 역시 기대한 만큼 충족한 나날…… 산은 거실이나 서재, 주방 등 집 어디에서도 사시사철 한 결 같이 나를 반겨준다.연둣빛 신록에 눈이 부시는 한적한 오후다. 나는 아낌없이 쏟아내는 산의 정기에 한 차례 목욕을 한다. 그 동안 빌딩숲 속에서 부대껴온, 켜켜이 쌓인 도심의 피로를 나름대
남다른 춘삼월, 춘삼월이 저만치 거리를 두고 떠나간다. 이번에 특별히 고안한 지침대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묵묵히 떠난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자연과 사람과의 거리두기로까지 확대되었다. 나도 일찌감치 기품 서린 산수유는 물론, 고아한 향기까지 품은 매화와도 악수를 포기했다. 참 맥이 빠지고 서러운 나날이다.집 안의 짧은 동선을 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성이는데, 문득 의심의 기운이 뻗친다. 누군가에게 눈딱총을 놓듯 눈에 힘이 들어간다. 도대체 이 상황이 뭡니까? 정말 실제 상황 맞아요? 행여 가상의 세계에서 괜히
겨울이 흐지부지 가고 있다. 제대로 맹위 한 번 떨치지 못하고 어깨만 실없이 들썩이다가 슬며시 꼬리를 내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낼모레니 겨울은 이미 가고 봄이 왔다고 해야 옳겠다. 하지만 체감 온도는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이다. 문득 씁쓸한 기운이 온몸에 번진다. 조석지변도 유분수라더니, 지금 내 정신세계가 요동을 치고 있다. 엊그제는 온난화 기온에 쌍심지를 키며 덤벼들다가 오늘은 어서 빨리 따뜻한, 아니 뜨거운 봄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한다. ‘신종코로나19’ 탓이다.일단 꽁꽁 얼어
이 계절이 겨울인가? 계절을 망각할 정도로 매일 매일이 포근한데, 오늘 오후는 유난히 더 햇살이 다사롭다. 나는 얇은 패딩 차림을 하고 용마산 데크길로 향한다.사가정공원에서부터 망우산에 이르는 데크길은 우리 동네의 명소다. 작년 3월 개장한 이래 사랑하는 산책로 1호로 내 가슴속에 등재되었다. 일단 이 길은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등산로에 비해 친절한 지그재그 형태가 재미있고, 발바닥에 올라오는 판판한 나무의 감촉도 좋다. 카펫처럼 보드랍지 않는데도 왠지 카펫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뿐인가. 더불어 휠체어 바퀴도 마음껏 굴러가고,
영월 창령사터의 오백나한이 서울 나들이를 왔다. 오래 전 폐사된 절터에서 발굴됐기에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뚜렷하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미 지난해 춘천 국립박물관 특별전에서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나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성자로, 성과 속의 경계에 머물면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인간이다. 즉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위대한 성자의 모습을 지닌 인간이 나한이다. 에서는 부처 입멸 뒤에 부처의 말씀을 경전으로 편찬하기 위해 모인, 가섭을 비롯한 500명의 제
깊은 밤입니다. 커튼을 길게 내린 하루가 문마저 닫으려는 이 시간, 벌써 잠자리에 든 건 아니신지요. 저는 아직 말똥말똥합니다. 저는 요즘 잠자리를 회피하는 데에, 아니 잠자리에 반항하는 데에 부쩍 재미가 붙었습니다. 엊그제 둥근 보름달을 눈에 담은 후유증인 것도 같은데, 모를 일입니다. 꽉 찬 달과 마주하면서 왜 저는 뜬금없이 텅 빈 제 가슴을 보았을까요. 그때처럼 고적감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아무래도 오늘밤, 선배를 붙들고 소소한 얘기라도 조잘거려야 할까 봅니다. 해가 노니는 낮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커피부터 대령해놓고 눈을 마주
나는 날개를 접은 한 마리 매미다.젖 먹던 힘까지 다리에 실으며 입을 앙다물고 주문을 외듯 진지하게 읊조린다. 나는 전신을 나무 등걸에 밀착한 매미를 연상하며 최대한 암벽과 한 몸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암벽은 여태까지 지나온 암벽들과는 달리 밧줄이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발을 디딜 만한 간격으로 움푹움푹 홈이 파여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없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지면서 남편의 꽁무니만 쫓아 열심히 기어오른다. 남편도 나와 거의 똑같은 자세여서 나를 끌어올려줄 상황이 아니다. 일순간 비장감이 가
나는 잠 잘 때마다 거의 매일 꿈을 꾸는 편이다. 어떤 경우에는 꿈속에서 또 잠을 자는 입체적 꿈까지 꾸면서 꿈과 현실을 혼동하기도 한다. 장자는 나비의 꿈을 꾸고 나서 물화(物化)를 얘기했지만, 나는 그저 꿈속의 이야기에 내재된 의미 파악에만 열을 올린다.어린 시절, 나는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며 신비한 환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지금도 물론 그런 꿈은 진행형이다. 나는 유난히 금성과 화성에 관심이 많다. 그 별들의 밝기나 빛깔 등의 과학적 사실은 뒷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을 관찰한다는 게 그저 큰 즐거움이
굴지의 대학병원에서도 못 찾았으니 어떡한다? 까짓것 현해탄 건너 동경대, 그래도 안 되면 태평양 건너 가보는 거지 뭐.큰소리로 떠벌이는 남편의 얼굴은 조롱 섞인 웃음으로 터질 듯하다. 나도 질세라 히죽거리며 선뜻 답을 챙긴다.그냥 태평양 건너 하버드로 직행해요.나는 지난 열흘 동안 꼼짝없이 가시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녔다. 유난히 생선을 좋아하는 나는 그날 점심 메뉴로 생선회를 선택했다. 회를 별로 즐기지 않는 남편은 회 몇 점을 먹고는 바로 매운탕을 주문했다. 불판 위에서 맛깔스럽게 끓어오르는 매운탕. 화관처럼 피어오르는 고춧가루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서정주의 시구가 떠오르는 가을이다. 하늘은 더없이 청명해 쳐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이면서 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아니 자질구레한 인생사가 훌쩍 떨어져나가면서 드넓은 바다 같은 심정이 된다. 가을은 역시 남성의 계절임이 분명하다. 해서 유목민인 내 남편이 펄펄 나는 계절이기도 하다.남편은 유목민의 근성을 주체하다 못해 서슴지 않고 정년을 앞당겼다. 유랑, 그것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일는지도 모른다.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나이가 예순둘이라고 했던가? 나보다 열 살이나 아랜데, 입술을 샐룩이다 휑하니 돌아서면 어쩌나? 송 씨는 30분이 지나도록 거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은 더 쭈글쭈글해지고 검버섯도 몇 개나 더 도드라졌다. 괜히 부아가 치민다.“아버님, 11시쯤 도착할 게요. 준비하고 기다리세요.”마치 자기가 맞선을 보는 양, 달뜬 며느리의 전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혼자 지낸 지 벌써 1년이다. 1남 2녀가 모두 출가하여 같은 서울에서 살지만, 아무도 송 씨에게 관심을 두는 자식이 없다. 며느리만 이따
6월 말인데도 산중턱에 자리한 방갈로 안은 서늘하다 못해 싸늘하다. 송아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고 윤주, 미숙과 나란히 누웠다. 셋은 여고시절부터 삼총사였다.“방갈로로 오길 정말 잘했다. 그치?”윤주가 방실거리며 모깃소리를 낸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다. 셋만의 빛의 속도가 유효했다. 쉰둘의 나이에서 십 대의 풋풋한 소녀시대로 되돌아온 것이다. 미니스커트와 핫팬츠로 거리를 활보하던 그때처럼 셋은 한참을 재재거리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불현듯 송아는 인기척을 느낀다. 뭉게구름처럼 보드라운 생명
강중근씨는 무작정 차를 몰고 어둑어둑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다. 생각할수록 화가 부글부글 끓는다. 벼르고 벼른 기세였다. 아내 진소미는 가자미눈을 하고서 한여름 소낙비에라도 빙의된 듯 마구 퍼부어댔다."지겹다, 지겨워. 떼거리로 몰려다니면 다야? 꼴같잖게 무슨 귀하신 얼굴이랍시고 모자 푹 눌러쓰는 것도 모자라 마스크를 파스인 양 착 붙이고… 도대체 결과가 뭔데? 집은 용케도 잊지 않고 기어든단 말씀이야, 흥!"아내는 완전히 딴사람처럼 냉갈령부리며 중근씨를 휙 밀치고 돌아섰다. 얼음바람이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듯 몰아쳤다
14박 15일의 긴 여행은 난생처음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니 쿰쿰한 냄새가 제일 먼저 달려든다. 들숨을 애써 참으며 베란다로 직행한다. 묵직한 베란다 유리문을 시작으로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젖힌다.나는 지난 학기에 과감하게 학교를 그만두었다. 중학교 교단에 선 지 26년 만이었다. 소위 우아한 명퇴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갑작스런 결정이었다. 계절 탓이었을까. 그날은 유난히 연둣빛 이파리들이 살랑거리고 다사로웠다. 여느 날처럼 퇴근하고 돌아와 무심코 거울 앞에 앉았는데, 뒤통수가 소리 없이 울렸다. 연둣빛 세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대화를 좀 나눠도 되겠습니까?”“네? 네에…….아나운서처럼 매끈한 중저음의 목소리다. 심 여사는 선뜻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심 여사의 입과 눈은 대번에 세 살배기 새싹처럼 활짝 열린다.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남이 되어버린, 그 여리고 부드러운 표정이라니.비행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을 뒤로 한 채 뭉글뭉글한 구름 속으로 벌써 진입했다. 그렇잖아도 난생처음인 1등석의 기내는 상상 이상으로 쾌적해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남자와 심 여사의 좌석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